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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4. <요재공>진사공휘비종중세천비문(進士公諱斐宗中世阡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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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요재공>성균진사공묘표(成均進士公墓表)휘비(諱斐)
성균진사공묘표(成均進士公墓表) 公姓趙氏諱斐字文伯玉川人高祖諱洪珪版圖判書曾祖諱佺文科追封玉川府院君祖諱元吉號農 隱與圃牧諸賢世稱五隱官門下侍中封玉川府院君諡忠獻考諱瑛號樂齋官至副正我太宗徵以吏 判世子師傅不就與弟虔谷公瑜入杜門洞守罔僕之節妣郡夫人延安金氏大護軍寬義之女公天性 至孝幼而失祜隨伯氏司正公攀號哭泣能如成人及長丁内艱哀毀不欲生與伯氏廬墓泣血三年如 一日常而早孤未服斬衰爲至痛又以欲報罔極之意揭銘于座而常目之如公其可謂終身慕者矣公 自幼事叔父虔谷公晨昏拜省一如所生文藝夙就己自弱冠有聲場屋永樂丁酉中司馬兩試即賦遂 初無意進就曰奔走要路患得 患失 吾所恥也盖其不事王候高尚其事者如此不亦賢乎虔谷公 在麗俗短喪之日負土築擴廬墓終制至蒙世宗旌表之典盖孝即公家氈裘也公之昆季克趾其美故時人咸稱有是父子難爲兄弟也嗚呼即此一臠而可其知其全鼎也葬淳昌柳等面猪灘村負丙原配 全州崔氏正郎進明女忠翼公晚六瀁孫賢有婦德墓雙塋四男長順履生進伹中次思履生員次明履文正言次恒履三女適宋碩之朴思宗金石達長房二男益孚攸孚二房三男時雄司直時平正言時若 承旨三房一男時哲二女適禹孝孫梁賢孫四房三男時英時衡時均曾玄以下不盡記後孫相勳東熙 等將伐石表阡請不佞以記其陰余窃惟世代遙遠文獻疎略生卒年月事行始終無可攻證然孝載邑 誌名掛榜目公之不朽庶其在玆謹書如友不敢妄加溢辭云爾 月城崔永祚 撰 十九世孫 仝基 謹書 성균진사공묘표(成均進士公墓表) 공의 성은 조씨요 휘는 비(斐)요 자는 문백(文伯)이니 옥천인이라. 고조의 휘는 홍규니 판도판서요 증조의 휘는 전이니 문과로 추봉 옥천부원군하고 조의 휘는 원길이요 호는 농은이니 포은 목은 제현으로 더불어 세상이 오은이라 하다. 관은 문하시중 봉옥 천부원군 시호는 충헌공이시다. 고의 휘는 영이시고 호는 요재이시고 관은 부정이시다. 태종께서 이조판서 세자사부로 부르셨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아우 건곡공 유(瑜)로 더 불어 두문동에 들어가 망복의 절개를 지키셨다. 비위는 군부인 연안김씨니 대호군 관의 女시니 공의 천성이 지효하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시고 백씨 사정공을 따라 더우잡고 우는 것이 능히 어른 같으며 성장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하사 살고저 않으시고 백씨로 더불어 여묘 사시고 三년을 하루 같이 하시며 항상 나이 어려서 참최복 못 입은 것을 지통을 삼고 망극의 은혜를 갚고저 하는 뜻을 자리 곁에 써서 걸고 항상 눈여겨보시니 公 같은 분은 그 가히 종신모라 할지로다. 공이 어려서부터 숙부 건곡공을 섬김에 어슴새벽 배성하기를 소생부모나 한결같이 하시다. 글재주가 일즉성취하야 二十세부터 과거장중에 소리가 났고 영락정유에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처음 진사되었을 때부터 진취할 생각이 없고 말씀하시기를 요로에 분주하며 득실을 근심하는 것은 내의 부끄러워하는 바라고 하셨으니 대개 그 왕후를 섬기지 않고 고생하신 그 일이 이 같으니 또한 착하지 않으랴. 건곡공이 여속단상지일에(고려때에 백일종상)있으매 흙을 지고 봉분을 쌓고 여묘로 예제를 마치니 세종정표의 은전을 받게 되었으니 대개 효는 공의 집을 대대로 이어받음이라. 공의 곤계가 극히 그 미를 본받은 고로 시인이 다 이르기를 이부자는 있어도 형제되기는 어렵다 하였다. 슬프다. 즉 이 고기한 점으로 그 온솥에 맛을 가히 알지로다. 순창유등면저탄촌병좌원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전주최씨 정랑 진명의 녀니 충익공만육양(瀁)의 손이신데 착하여 부덕이 있으시다. 묘는 쌍여이다. 모두 四남이신데 장은 순이(順履)니 생원진사다 하셨고 다음은 사이(思履)니 생원이고 다음은 명이(明履)신데 문과 정언이고 다음은 항이(恒履)시고 三女는 송석지박사종김석달(宋碩之朴思宗金石達)에게 출가하셨다. 長房은 二男이니 익부유부(益孚攸孚)요 二房은 三남이니 시옹(時雄)은 사직이요 시평(時平)은 정언이요 시약(時若)은 승지이며 三房은 一男이니 시철(時哲)이요 二女는 우효손양현손(禹孝孫梁賢孫)이요 四房은 三男이니 시영, 시형, 시균(時英時衡時均)이니 曾玄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후손 상훈, 동희(相勳東熙)등이 비돌을 깎아 세우고저 함에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간절히 생각건데 세대가 요원하고 문헌이 소략하여 생졸년월일과 사적행실의 시종을 가히 고증할 수 없으나 효행이 읍지에 실렸고 이름이 방복에 걸렸으니 공의 불후함이 거의 여기에 있으니 삼가히 우와 같이 쓰고 감히 망령되게 찬사를 더하지 않는다. 月城(월성) 崔永祚(최영조) 撰(찬) 參奉(참봉) 十九世孫 仝基(동기) 謹書(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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